작계 80518 영상 - 518 첫번째 발단 사건
- 정 담

- 3일 전
- 2분 분량
정부와 518 단체 그리고 모든 518 역사 연구가들은 518 첫번째 발단사건이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반 전남 대학교 정문에서 등교를 하려고 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7공수 경비병들 간의 투석전이라고 확정적으로 발표했고, 그래서 모든 국민들의 기억과 교과서의 역사 기록과 재판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1980년 5월 18일 새벽 4시 아시아 자동차에는 카빈총을 맨 2명의 괴한이 침입해 직원들에게 총을 겨누고 5톤 군용 레커차와 2.5톤 군용 카고 트럭을 강탈해 간 사건이 첫번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18 군사반란은 발단 사건부터 총을 들고 시작했던 것이고, 이 작전은 빼앗은 군용차를 이용해 나주 예비군 무기고를 강탈해 무기를 탈취해 김대중 여단 병력들과 광주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과 김대중 여단 병력들이 강탈한 무기를 시내에서 작전중인 이을설 부대원 600명과 합세해 광주를 점령하고, 이미 44군데 무기고에서 대기중이던 김대중 여단 병력들에게 아시아 자동차를 기습해 군용차 400여대를 강탈해 기동을 해서 5,404정이 무기를 싣고와 광주와 전라도 전역을 해방구로 만들고 대전으로 진격을 하면 김일성이 전면 남침을 하려고 했던 작전의 선견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계엄 확대와 김대중의 체포 그리고 김대중 세력에 대한 체포와 수배로 나주로 행군을 하려던 군용차 2대의 안내와 호송 임무를 맡았던 김대중 여단 병력들이 도주를 해서 결국 18일은 작전을 못했고, 19일 오후 3시 40분이나 되서야 나주 예비군 무기고를 기습하게 되어 시간이 늦게 되어 이들 차량 2대는 탈취한 다량의 무기를 싣고 목포로 갔고, 작전은 실패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19일 나주에서 군용차가 예비군 무기고를 들이 받아 파괴를 하면서 무기를 강탈하는 모습을 본 주민들이 직접 서울 보안사에 신고를 했고, 신고를 받은 보안사는 육본에 직보를 하면서 그 즉시 20사단의 출동이 결정되고, 20사단 출동 과정에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열차수송에서 육로 기동으로 변경을 하면서, 그 차량을 강탈하는 소위 군분교 점령작전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차량시위 양동작전 그리고 보안사 특별 감찰반의 광주 파견등 사건이 확대되어 가면서 작계 80518 작전 범위가 확대 되었던 것 입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새벽 4시 아시아 자동차 기습 사건은 당시 아시아 자동차에서 근무했던 직원의 목격담과 19일 나주에서 예비군 무기고를 들이받고 무기고를 습격해 다량의 무기를 강탈한 광경을 목격한 김동문 기자의 증언과 나주 주민들의 보안사 신고 사실 그리고 목포로 갔던 차량들이 21일 아침 일찍 힌츠페터에 의해 촬영된 사실과 아시아 자동차 피습 자동차 목록에서 군용레커차가 기록이 되어 있는 사실과 수량이 1대였다는 다양한 사실로 틀림없는 작전이었음에도 스카이데일리와 지만원 그리고 특검과 검찰 수사기록에는 다 배제되거나 외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방산업체에서 총을 든 괴한에게 계엄하에서 군에 납품할 군용차를 강탈당해 반드시 계엄사령부에 신고를 했었고, 그럼에도 계엄사령부는 이 신고를 묵살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지휘부와 31사단 지휘부 전남도경 지휘부는 청죽회 회원들이 주력이었기에 아시아 자동차의 신고를 묵살하고 이을설 북한군 중장의 작전 지휘를 받았다는 것이 이렇게 확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명백하고 중대한 북한 남침을 위한 선견작전을 왜 정부와 검찰 그리고 나중에 김영삼 특검까지 다 모른체 했는지 국민들은 똑똑히 기억을 해야 합니다.
오늘은 518 첫번째 발단 사건에 대한 영상으로 작계 80518 군사작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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