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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실

​무엇을 속이고 있나?

아직도 미회수 군용차량이 19대가 있습니다.

518 반란군은 바로 전투교육사령부와 김대중 여단 4,000명 반란군 그리고 이을설 부대 600명으로 구성되어 작전을 했고, 이을설 부대는 21일 수협빌딩 집단발포로 전멸을 하다 시피해 작전불능 상태로 25일 01시 군용차량 19대에 분승해 영광해안을 통해 야반도주를 했고, 전투교육사령부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듬해 해체해 버렸고, 김대중 여단 반란군은 유공자란 이름으로 518 각종 단체를 장악해 지금도 적화통일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518 관련 수사기관 국회 청문회 특검 그리고 수많은 특별조사위원회은 거액의 국가예산을 들여 여러차례 조사를 하면서 진실을 조작 왜곡 하였습니다.

518 첫 시발 사건은 전남대 정문에서 경비병들과 학생들간의 충돌사건이 아니라 새벽에 아시아 자동차에 자칭 서울서 지원 나온 대학생 2명이 카빈총을 들고 침입해 5톤 구난차 1대와 2.5톤 카고 트럭을 강탈해간 사건이었고, 이 사건이 바로 아시아 자동차 1차 기습 사건이며, 전교사는 아시아 자동차 1차 침입사건 신고 조차 묵살해 버렸는데, 518은 이렇게 총을 들고 시작했고, 전교사가 개입한 사건 입니다.

가장 큰 조작은 도청앞 집단 발포 사건인데, 자칭 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동원해 오후 1시 또는 오후 1시 30분에 사격을 했다고 공수부대 지휘관들 인터뷰 그리고 검찰 조서를 인용해 국민들을 호도 하면서 정부가 공식 발표를 한 것이고, 그날 공수부대가 오후 1시 30분 경 집단발포를 해서 61명이 사망했다고 하면서 KBS를 통해서 3D 지도로 61명 사망자 사망 위치까지 표시를 방영하면서 합리화를 시도했지만, 정작 도청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부터 4시 약간 넘어서 까지이고, 진실은 11여단 4지역대 만 각각 실탄 15발 정도씩만 지급받고 수협건물 옥상에 배치되어 사격준비를 하던 중, 결정적 시기가 닥치자 지휘관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신동국 중위만 남아 있어서 신동국 중위의 공포사격을 신호로 해서 65명이 군중들 속에서 머리띠, 수건 목도리, 완장, 빨간 T셔츠를 입고 군중들을 선동하던 사람들을 표적으로 해서 한명 한명씩 조준 사격으로 모두 사살을 했는데, 400여발의 실탄으로, 일발필중으로 사격해 사살한 인원은 나중에 402명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들 시신들은 정부 발표와 망월동 매장 명단에도 없고, 이들 시신들을 숨긴 것이 바로 도청앞 집단 발포의 비밀이었던 것 입니다.

이들 시신 402구와 교도소 습격시 사살당한 28구 등 430구는 상무관 옆에 경직된체로 마구 쌓고 큰비닐로 덮어 숨겨 두었고,  그 당시 타임지 표지에는 하얀 페이트로 얼굴이 칠해져 쓰레기차에 25구씩 실려서 수십대 청소차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진이 실렸었는데, 바로 이 시신들이었고, 도청앞 집단 발포로 사망했던 시신들이었고, 사진에서 봤을때 손발이 부패되지 않고 깨끗한 상태였던 점을 감안 한다면, 518 재단에서 발표했던 1980.5.22일 오후 3시 8분 서울서 온 대학생들 500명 환영식 선전물이 바로 이 시신들에 대한 처리 기록이었던 것이며, 이 시신들이 광주시민들이었다면 유족들이 있기에 절대로 시신얼굴을 하얀색 페인트 칠을 해서 신분을 감추지는 못할 것이고, 망월동에 이들 시신이 매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430구의 시신은 망월동이 아닌 청주에서 발견된 것 입니다.

이렇게 도청앞 집단 발포와 교도소 습격 피살로 사망한 연고대생 430구의 시신을 처리한 후, 24일 송암동에서 11여단 1,000며명의 특전사 병력을 교도대대 1개 분대를 교수부장인 장군이 교도대대 중령에게 90미리 무반동 총 2정을 휴대한 1개 분대를 11여단에서 갓 전입온 대위를 분대장으로 해서 출동시켜 매복했다가 접근하는 11여단을 공격해 오인사격으로 위장하고 사고 조사를 이유로 그날 밤 3개 공수부대 여단 병력을 모두 광주 비행장으로 철수시켜 광주와 목포 도로 경계를 못하게 조처를 하면서, 목포 앞바다는 유병현 함참의장이 해군 경비 병력을 모두 변산으로 철수시켜 전남도청부터 목포 앞바다 해상까지는 단 한명의 경비병력이 없는 상태로 병력배치를 해 놓았던 것 입니다.

 1980.5.25 01시 경, 아시아 자동차에서 강탈한 차량 19대에 전남도청에 주둔했던 연고대생 600명이 분승해서 목포로 사라진 후 차량과 인원이 행방불명되고 그 차량들은 42년이 지난 아직도 회수가 안되고 있는데도, 국가와 각종 조사위원회는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감추고 있습니다.

 

이밖에 20사단은 기습을 빙자해서 차량과 M60 2정 실탄 200발 M16  소총4정 그리고 음어까지 연고대생들에게 넘겨 주는데, 음어분실을 숨겨서 21일 밤 조선대 뒷산을 통해 미군부대로 도주하던 11여단장을 미리 앞질러 가 생포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는데, 바로 이 시간이 북한군 상장 문재심이 영광 앞바다에 상륙한 시간이었읍니다.  

또한, 전교사는 북한군에게 한국군 군복을 입혀 교도대대 조교로 위장시켜 11여단을 오인사격이란 이름으로 공격하다가 11여단 반격으로 1명이 사망했는데, 한국군이 아니므로 동작동에 묘지를 만들지 못해 통합병원 방위병을 전교사 소속으로 속여 묘지 숫자를 맞추고 있다가, 42만에 본 단체에 의해 적발되어 국방부와 518기념재단에 정보공개 요청을 하는 등 추궁을 하자 현재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대상 과제로 선정되어 있어, 본 모임에서는 이를 꼭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가 아니라 북한군과 함께 합동작전을 했다가 맞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세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518 진실 게시판과 블로그를 통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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