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유골 430구는 특전사 11여단 62대대 4지역대 집단발포 희생자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 주둔했던 진압부대 중 오후 3시 넘어 전 부대 장병에게 실탄이 지급된 부대는 11여단 62대대 4지역대 뿐이었습니다.


다른 부대는 중대장급 이상에게만 한 탄창 15발이 지급되어 비상시 대처용으로 사용되었고, 이 실탄들은 위급시에 간헐적으로 사용되어 모두 사격 기록들이 남아 있는 실탄이었습니다.


바로 이 실탄 사격을 정부, 좌익, 우익을 위장한 인사들이 집단발포로 몰아갔고, 이런 다수적 위압으로 역사에 오후 1시 도청앞 집단 발포로 기록되었고, 교과서에 채택해 아이들이 배우는 것 입니다.


그러나, 실제 집단 발포는 오후 3시 30분부터 4시까지 30분간 400여발 이상이 실탄이 수협빌딩 옥상에 배치된 11여단 62대대 4지역대 65명의 병력이 도청 앞으로 진군해 오는 군중들 속의 특수 비표시자들을 식별해 한발 한발로 표적사격을 해 402명을 사살한 사건을 말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전교사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가려지게 되고, 군 작전기록에서도 삭제되고 어떤 수사기관이나 조사 위원회에서 조차 배척되어 집단발포는 21일 하루 종일 광주일대에서 피살된 광주시민 전체 사망자를 도청앞 집단 발포 희생자로 꾸며지고, 집단 발포 시간은 조갑제나 지만원 같은 인사들의 활약으로 오후 1시 또는 1시 반으로 굳어지는 져, 518 역사는 왜곡되게 된 것 입니다.


국회 청문회,특검, 국방부 특별조사 위원회, 온갖 위장우파 유튜브에서 조차 “내가 도청앞 집단 발포 명령자다. 나를 잡아가라” 외쳐도 본체만체 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으면서, 집단 발포와 관계가 없는 특전사 지휘관들을 도청 앞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불러다 집단발포에 대한 추궁을 하지만, 정작 현장에 없었던 그들은 집단발포와 관련이 없으므로 모른다 들었다 본 것은 아니다 란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고, 이를 근거로 오후 1시 정도를 집단발포로 규정해 발표를 한 것이 지금의 518의 역사랍니다.


그럼, 518의 진실인 도청앞 집단 발포에 대한 관련 증거들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이 자료는 518 피해자이면서 518 조사 주체인 518 연구소의 주장입니다.



이 자료는 유일하게 도청앞 발포를 1,2,3차로 세분화 했고, 1차 사격은 우발적이며, 2차 3차 사격은 용납할수 없다고 하며 구체적 사격피해를 진술하고 있는데,


1차 사격이 바로 조갑제 지만원 등이 주장하는 오후 1시 사격설이고, 2차는 오류이고, 3차 사격이 바로 신동국 중위가 주장하는 오후 3시 30분~4시 사격 시간과 사격방법이 일치합니다.


당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시민군 당사자들 주장을 보겠습니다.



3시 20분경 도청으로 진격을 시작해 5시 30분까지 시가전이 치루어 졌고, 이 시간에 엄청난 희생자가 생겼다고 진술하는 것은 사격 명령자인 신동국 중위의 진술과도 일치 함.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안이 있는데 바로 전교사 윤흥정 사령관이 신동국 중위가 사격을 끝냈다는 시간인 오후 4시에 11여단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진술입니다.



서울지검과 국방부검찰이 신동국 중위가 사격을 끝냈다는 그 시간에 전교사 사령관이 공수부대 철수를 지시했다는 조서를 작성해 놓지만, 이 조사와 공판 조사는 완전 다릅니다.



공판조서란 재판정에 제출된 증거자료이며, 여기에는 20일밤 8시 윤흥정 사령관은 특전사 철수명령을 승인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시간은 바로 연고대생들의 군분교 점령작전 장애물 설치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 진입로 절개절단 야간 전투공병 작업이 시작되는 시간인데, 윤흥정 사령관은 20일 밤 8시 육본으로부터 특전사 철수 명령을 받아놓고 이를 은닉한 후 소위 말하는 연고대생들이 작전을 하고 있는 “군분교점령작전”을 은폐해주고, 다음날 오전 진행될 아시아 자동차 기습작전에 대비해 20만 광주시민들이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던 것 입니다.


한편, 11여단 62대대 4지역대에게 전멸당한 연고대생들 402명의 시신들은 군중들 속에 있었던 동료들과 시민들에 의해 시신들이 도청으로 운반되어 상무관 뒤쪽 차단지역에 경직된 상태로 쌓이게 되고 비닐로 덮어져 숨겨 놓았다가, 교도소 습격으로 3공수여단에게 사살된 28구의 시신이 모두 도착하자 확인 작업을 마치고 시신처리를 하게 됩니다.



이 시간 이 장소는 시민군 본부를 운영했던 연고대생 600명이 통제를 했기에, 저렇게 시간을 분까지 기록한 것으로 봤을때는 430구 시신에 대한 확인을 끝낸 시간으로 볼 수 뿐이 없는데, 유일하게 저 시간에 광주 전남도청에 출입을 할 수 있었던 조갑제 기자가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은 실제로 공개된 환영식이 아닌, 비밀리에 진행된 430명의 확인작업을 이렇게 기록처리 한 것 입니다.


그리고, 이후 타임지 잡지 표지 사진으로 청소차 대열에 실려 얼굴에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경직된 체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청소차에 25구씩 실려서 어디론가 가는 사진을 봤었는데, 청주에서 발견된 시신들 포장이 1구씩 비닐포장을 하고 25구의 시신들을 또 한묶음로 포장을 했 매장을 했다는 사실을 봤을 때는 사실들이 일치하는데, 아래 목격자들 진술을 보십시오.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조사기록에는, 광주 시립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사람의 손을 거친 시체가 594구였고, 당시 사망한 광주시민의 숫자는 정확히 164명 이므로, 청주에서 발견된 시신 430구 와 일치합니다.


반면 지만원 박사가 주장하는 교도소 습격을 하다가 430명이 설탕고지에서 사살되었다는 사실은


첫째, 야간에 대부대가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해도 외곽에 있는 지역에서 한밤중에 누가 시신 430구를 도청 안 상무대까지 운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남습니다.


둘째, 세계 전사에 기록되어 있는 짜빈동 전투도 증강된 여단병력이 증강된 중대병력을 야간에 기습을 했고, 105밀리 곡사포 지원과 각종 화포가 지원되었어도 발견된 시신은 200여구가 안되는데, 고작 경기관총 1,2정 앞에 430여명이 사망했고, 그 시신들이 인적이 없는 야간에 광주시내 도청까지 감쪽같이 운반될 수는 없습니다.


셋째, 3공수 선임상사는 교도소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은 28명뿐이라고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어 신빙성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청주 유골 430구는 신동국 중위가 발포 명령을 했던 11여단 62대대 4지역대 65명이 21일 오후 3시30분부터 4시까지 30여분간 400여발로 수협 옥상에서 전남도청을 향해 서서히 진군해 오는 시민대열을 향해 군중들 속에서 비표시를 하고 있었던 연고대생들만 골라서 조군 사격을 해 402명을 사살한 것이고,


이 진술은, 518 재단측의 1,2,3차 사격 주장과도 일치를 하고, 현장 시민군들 진술과도 일치를 하며, 검찰과 군검찰의 윤흥정 사령관의 21일 오후4시 신동국 부대의 사격이 끝나자 철수명령을 내렸다는 조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동안 정부와 좌익들 우익을 표방했던 인사들이 감추고자 했던 도청 앞 집단 발포의 진실은 상기와 같으며, 청주 유골 430구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말로만 떠 돌던 연고대생 600명에 대한 실체 조사를 해야만 하며,


도청에 주둔했던 연고대생 부대들이 430구 시신을 처리하고, 24일 오후 2시경 11여단을 송암동에서 공격한 후 3개 공수여단을 광주 비행장으로 철수 시켜 놓고, 광주 목포 그리고 목포 앞바다에 경비가 없었던 시간대를 이용해 강탈했던 군용차 19대에 분승해 25일 01시에 도청을 탈출했고, 그들이 타고 간 19대의 군용차는 아직도 반납이 안된 사실도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이로써, 518은 전교사가 전적으로 개입한 사건으로 18일 새벽 아시아 자동차 2대 탈취사건, 19일 나주 예비군 무기고 탈취사건과 숨겨놓았던 군분교 점령사건도 철저히 조사를 해서 전투교육사령부와 관련자 전원을 엄벌해야만 합니다.


애국노 정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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