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교육사령부 예하 교도대대가 11여단의 차량행군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선제사격을 가했고, 이에 11여단이 응사해서 벌어진 사건을 오인사격이라고 43년간 선전선동을 하였고, 국방부 특조단과 국회청문회 검찰의 조사와 법원의 재판을 통해서 오인사격으로 법적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적 내용은 쌍방간의 오인사격이 아니라, 전투교육사령부가 부대가 전멸하다시피한 북한군의 철수작전을 돕기 위해서 11여단을 공격해 많은 피해를 야기해 사고수습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3개 공수여단 병력을 광주비행장으로 철수시켜 놓고, 이들이 경계를 해야 할 지역을 경계 진공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 그 진공속으로 북한군이 아시아 자동차에서 강탈했던 19대의 군용차량을 타고 광주를 빠져나가게 하기 위한 유인사격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북한군이 도청에서 탈출하면서 타고 나갔던 아시아 자동차 강탈 군용차량 19대는 지금도 반납조치가 안되어 있고, 발견도 안되고 흔적조차 없기에 함정에 탑재해 북한으로 가지고 간 것입니다.
김병엽 교수부장은 시민제보를 받고 시간이 없어서 자기가 병력을 출동시켰다고 하지만, 당연히 전교사령관에게 보고를 했어야 하는 사안이었고, 왜 교도대대가 출동하기 직전에 20사단 작전 관할권을 교도대대 작전관할권으로 변경했는지, 왜 작전지역데 대인지뢰와 대전차 지뢰를 매설했고,90밀리 무반동총을 휴대시켜 출동했는지, 그리고 8명의 병력으로 감히 특전사 1,200명을 공격할 수 있었던 병력의 실체는 누구였는지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 작전은 21일 오후3시반 도청 앞 수협빌딩에서 11여단 62대대 4지역대에게 집단사격을 당해 북한군 400여명 이상의 전멸을 당하게 되자, 철수가 결정되었고, 철수작전을 위해서 그날 밤 학생수습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통합병원 점령작전이 실시되었고, 22일 아침에 전교사로 연행되었던 시위대를 가장한 북한군 34명이 학생수습위원회에 의해 석방되었고,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목포에서 도청으로 33명의 김대중 여단 병력이 20사단 검문소를 통과해 광주로 진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22일 오후3시 20사단 검문소를 통과한 병력이 전남도청에 도착한 시간은 23일 저녁 7시로 조작을 했고, 전교사에서 석방한 북한군들은 23일 학생수습위원회가 인수해 온다는 검찰조서를 가짜로 만들어 인터넷상에 띄워 놓았던 것입니다.
22일 석방된 북한군들은 한국군 철모와 군복 배낭과 탄띠를 지급 착용한 상태로 석방되었으며, 이들에게는 M16소총 34정이 지급되었는데, 이 사실은 전교사 M16소총 분실 대장과 일치하며, 25일 도청 지하에서 이들을 목격한 목격자들에 의해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군에게 집단 발포를 한 11여단 62대대 4지역대를 섬멸하기 위해 11여단 행군제대를 선임대대인 61대대가 아닌 62대대를 앞세웠다가 62대대 한 병사가 설사로 인한 용변 때문에 장시간 지체를 하자 63대대가 선두로 나셨다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전에 투입한 북한군 8명을 보호하기 위해 김대중 여단 병력 50명씩 100명을 매복지점 좌우측에 또 매복을 시켜놓고 특전사의 반격을 저지시켰는데도 1,200명의 특전사 병력의 반격을 막지 못해 매복을 했던 교도대대 조교로 위장한 북한군 1명이 사살되었고, 이 북한군이 그 당시 신분이 교도대대 조교로 위장했기에 동작동 국립묘지 518 묘역에 매장을 해야 함에도 매장을 하지 못했고, 망월동에 매장했으며, 그 시신을 대신하기 위해 전교사 소속 방위병을 전사 처리해서 동작동에다 비석숫자를 맞춰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정황이 하나 하나 다 확인이 되었는데, 이게 어떻게 오인사격일수 있는지 되묻고 있는 중이며, 유인사격이라고 확신해서 국방부에 문의를 해도 동작동에 가서 확인해라, 우리는 조사권한이 없다 등등 남의 나라 남의 군대 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도대대 조교로 위장했던 전사한 북한군을 대신해 동작동에 묻힌 방위병은 22일 통합병원 수복작전시 출근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재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통합병원은 21일 밤 북한군에게 점령되었고, 22일 오후5시에 수복작전 명령이 떨어져 작전이 개시되어 5시40분 수복이 되었는데, 어떻게 통합병원 앞에서 출근을 한다고 7시 40분에 방위병이 총에 맞을 수가 있는가는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5시에 출근을 한다는 방위병이 죽었다면 당연히 5시 이전에 죽거나 아니면 10시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대가 맞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왜 통합병원에서 퇴근을 했던 방위병의 전교사 방위로 둔갑되었고 퇴근이 왜 출근으로 둔갑되었으며, 퇴근후 시민군에게 칼빈총으로 사살되었다는 방위병이 왜 M16 소총에 사망한 것으로 검시가 되었는지도 의문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위병들도 518 당시 반란에 가담해 죽었는데 왜 통합병원 방위병만 전사처리가 되어 동작동에 묻었는지도 확인해야 할 대목입니다.
총을 들고 북한군이나 계엄군과 전투를 하다가 죽었다면 모를까 근무시간도 아닌 방위병이 길에서 죽은 걸로 처리되었음에도 어떻게 전사처리로 둔갑했는지도 의문이고, 이는 교도대대 조교로 위장한 북한군 대신 급히 군인신분의 시신이 필요해 급조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닌, 우리 것을 되찾는 수복작전을 하게 되면 안에 있는 고급장교들에게 미리 귀띰을 해서 불필요한 희생을 막는게 통상적인 작전 방법인데, 어떻게 경비병이 5시에 퇴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병원 앞에는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수백명의 정예 20사단 병력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그리로 퇴근을 할 수 있습니까?
또 전교사가 조작한대로 출근을 한다고 해도 이미 수복작전이 끝난 시간은 5시 40분인데, 왜 방위병이 길에서 배회하면서 7시 40분에 군인 총에 맞아 죽습니까?
이 방위병이 통합병원 앞에서 죽었다는 증거는 이 방위병의 사업주인 석유가게 주인이 방위병이 총에 맞은 걸 확인하고 구출하러 가다가 그 사람도 총에 맞아서 병원으로 실려가 밤 10시가 넘어서 죽었다는데, 그 사람은 카빈총에 맞았다는 겁니다. 이게 유일한 증거인데, 방위병과 석유가게 주인은 따로 따로 다른데서 죽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교도대대 조교로 위장했다 죽은 북한군을 대신할 군인 신분인 시신을 급히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석연치 않은 방위병의 죽음도 철저하게 재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일반 육군 병사 8명이 완전무장한 특전사 1,200명을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그래서 북한군에게 한국군 군복을 입혀 작전을 시켰던 것이고, 사고후에 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김기석 부사령관이 툭전사 11여단장에게 8명을 모두 코브라 헬기로 쏴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아무리 바보가 봐도 지금까지 이야기를 한 내용의 작전은 오인사격이 아니라 유인사격임은 다 알수가 있고, 한국군 교도대대 조교가 죽었다면 왜 동작동 518 묘역에 현역장병대신 소속을 속인 방위병이 묻혀 있는지는 뻔한 것입니다.
이렇게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특전사 전사자를 간첩활동을 했던 서욱 전 국방장관이 아군끼치 오인사격으로 희생되었으니까 순직이라고 순직처리를 해서 오인사격으로 대못을 박았는데, 이제는 대못을 빼고 진실규명을 해야만 합니다.
참고로 서욱은 문재인의 지시로 휴전선과 동서남해 주요기지 경비 감시 카메라 장비를 중국제로 도입해서 감시정보를 실시간 중국과 북한으로 보내게 했던 간첩입니다.
정말 간첩 1명을 100명이서 못막는다더니 .... 엣날에도 성하나 빼앗는게 간첩 한명이 성문열어놓게 만들면 된다고 하더니 ㅠㅜ
보면 볼수록 공산당 짓거리야. 유인한 안내장교도 있는데 뭔 오인사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