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2022년 6월12일 일요일입니다.
청죽회를 척결하는 시민 모임에서 오늘은 “도청 지하에 얼굴에 흰 페인트를 칠한 신분증 없는 시신 다수 있다” 이런 주제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뉴욕타임스 표지에 청소차 수십대가 열을 지어서 가고, 맨 위에 청소차 적재함에 얼굴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시신 25구가 실려 있었고 손발은 부패되지 않은 그런 사진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진을 촬영한 기자는 뉴욕타임스 기자(심재훈기자로 보임)였고, 르몽드지 기자(필립퐁스기자로 보임)와 함께 1980년 5월21일 광주로 들어갔습니다. 이 기자가 광주에 있으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 사진.. 그런데 이 기자들이 김대중 추종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타임지는 지금 찾을 수가 없지만 누군가는 갖고 있을 겁니다. 정확한 연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천리안과 하이텔을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컴퓨터도 귀했고, 플로피 디스크 사용하던 시절이라 저장을 하거나 하는 것도 불편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5.18에 대한 관심들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굳이 다운을 받아서 저장해 놓을 그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어 이것 봐라 이렇게 하면서 그 시신을 제가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총을 맞아 죽은 사람들이라 똑바로 누워 있는 상태가 아니라 총을 맞고 사망했을 당시에 그 자세로 죽어서 경직이 된 시체들이라 차곡차곡 쌓을 수가 없는 겁니다. 청소차에..
그리고 얼굴에는 다 하얀색 페인트가 짙게 칠해져 가지고 누구 얼굴인지는 확인이 안되죠. 이 시신들이 바로 청주에서 확인된 430구 시신이 틀림없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청주에서 수상한 시신이 비닐에 포장되서 발견됐다 이런 기사가 떴을 때 그 현장을 맨 처음에 찾은 기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빼고는 전부 다 430구 시신이 1m깊이에 일렬로 나란히 매장되어 있었다. 이렇게들 떠벌리고 있지만 그 사실 아닙니다.
맨 처음에 현장에 도착한 기자의 기사를 보면, 시신이 포크레인에 걸려서 나왔을 때는 25구가 1묶음으로 된 커다란 비닐덩어리(파란천막지로 보임) 였다는 겁니다. 그 덩어리가 차곡차곡 가운데 집중적으로 쌓아 놓은 형태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25구의 비닐을 푸니까 1구씩 비닐에 쌓인 시신이 25구가 나왔고, 그 비닐을 푸니까 칠성판이 있었고 시신이 있었으면서 옷도 다 벗겨놨다는 것.. 그리고 번호표만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최초로 목격한 기자의 기사입니다. 그러니까 뉴욕타임즈지 표지에 나왔던 사진에서는 모든 시신들이 얼굴에 페인트만 칠해져 있었지 입도록 그대로 입은 상태에서 실려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청소차에 25구씩 실어서 청주로 와가지고 거기서 다 옷을 벗기고 칠성판에 뉘어서 염을 해 가지고 비닐로 똘똘 말아 가지고 25구씩을 한 묶음으로 또 묶어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1996년 광주광역시 의사회에서 발간했던 5.18의료활동이라는 책에 발간위원인 조석필 의사선생님께서 그 당시에 자신의 일기장을 그 책에 기고를 한 겁니다.
그 일기장 1980년 5월23일자의 도청앞 오후4시 군중집회 때 도청안 지하실 에 신분증도 없고 얼굴에는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진 시신 38구가 있다 이런 소문이 쫙 돌았다는 겁니다.
그 당시 그 조석필 의사선생님은 전남대 소아과 레지던트 1년차였다고 하면서 그런 기고를 한 겁니다. 여기서 왜 군중들한테 그런 소문이 돌았냐 하면은 시신을 찾고 있는 군중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실종자 가족들은 어디 시신 있을까? 이거를 애타게 찾고 있었을 때 그 당시에 도청을 출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에 시신의 일부를 본 사람이 그런 발설을 한 거죠.
왜냐하면은 21일밤에 전남도청 지하에는 시민군본부가 차려졌고 6중 경비망을 쳐가지고 일반인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바로 학생수습위원회가 결성됐는데 학생수습위원회에서도 결정된 사항을 시민군 본부장의 재가를 받기 위해서 도청을 출입할 때도 경비병들에게 일일이 다 허락을 받아야 될 정도로 출입을 일반인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딱 두 사람이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면은 바로 조갑제 그리고 광주시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문으로 떠돌던 38구 시신은 망월동에 묻혀 있는 무연고12구 시신과 달리, 사망자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그런 시신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신이 도청 지하에 430구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도청앞에 운집해 가지고 집회를 하는 실종자 가족들은 어디 시신이 있나? 이것에 대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쫙 돌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을 기록을 한 사람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양아치 이런 사람이 아니라, 바로 5.18 기간 10일동안 또한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시신 처리를 했던 의사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그거를 일기장에 썼던 것이고, 그 일기장을 바로 광주광역시 의사회에서 발행하는 책에 기고를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의사선생님께서 38구의 시신이 있다 이런 소문을 일기장에 적으신 건데, 실질적으로는 430구가 맞는 것이 교도소에서 회수한 시신이 28구다 그렇고 나머지 402구는 03시30분(15:30)에서부터 04시(16:00)까지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대원 65명이 수협빌딩 옥상에 배치돼서 400여발이 넘는 실탄으로 조준사격을 했을 때 사망한 시신들이고 수협빌딩에서 사격을 하는 거를 직접 목격을 한 증언자의 증언이 이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430명이 바로 신분증이 없는 시신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숨기기 위해서 도청앞 집단발포를 오후 1시반으로 정부가 조작을 한 겁니다. 여기서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건을 책임을 졌던 전투교육사령부를 말하는 겁니다.
만약에 신분증이 없는 시신 430구 이것이 확인이 되면은 당연히 그 시신들은 북한군이다 이런 주장이 대두될 게 뻔했기 때문에 그 시신을 몰래 처리한 겁니다. 그것도 신분을 확인 못하게 얼굴에 페인트칠을 해서 쓰레기차에 25구씩 실어서 청주로 보내 가지고 특별한 방법으로 처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발포 시간을 1:30으로 억지로 꿰다 맞추어 놓은 거고 그거를 조갑제나 지만원 같은 사람들이 1시반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고, 조갑제는 거기서 한발 더 나가서 북한군은 안 왔다 이렇게 까지 해서 완전히 430구에 대한 시신과 집단 발포시간을 없애 버린 겁니다.
바로 1996년도 광주광역시의 의사회에서 발간했던 5.18의료활동이라는 책에 당시 의사였던 분이 기고를 한 내용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타임지 표지에 사진을 누군가 제게 보내 줄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진이 없다고 해서 430명에 대한 증명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국민들이 봤을 때는 더 빨리 납득을 하기 때문에 있으면 더 좋죠.
그 타임지 표지 사진을 갖고 계신 분들은 저에게 하루빨리 보내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제 5.18 특별법에 의해서 518때 발생했던 사실을 육군본부에 보고를 하지 않았던 전투교육사령부, 31사단, 20사단 모두가 엄벌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아예 지우지 못하게 풀어 놨군요. 정말 쌩 앙아치급으로 저질스럽게 대응하네요. 수준높은 간첩하고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