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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정 담

[단독] 5·18진상조사위원장은 ‘무장봉기’ 모의 주동자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송선태(67) 위원장(장관급)이 5·18 발생 일주일 전 ‘예비군 무기고 접수’와 ‘도청 점령’을 사전 모의한 이른바 ‘자유노트’를 직접 기록한 것으로 드러나 자격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또한 송 위원장이 5·18유공자로 등록돼 그동안 혜택을 받아 온 사실이 취재 결과 처음으로 확인됨에 따라 위원장으로서 중립 의무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제척 사유에 해당돼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송 위원장은 5·18 당시 전남대 4학년 복적생으로서 사실상의 ‘무장봉기’ 계획이 담긴 ‘자유노트’를 직접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유노트’는 일각에서 5·18이 ‘비폭력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위중한 문건으로 받아들인다. 방송국과 무기고·공공기관을 죽창을 동원해 접수하고, 탈취한 무기로 도청을 점령한다는 끔찍한 내용이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무장봉기를 사전 계획하고 획책하려 한 항쟁계획서로 보고 5·18 진실 규명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초점을 맞춘다.

이에 따라 막대한 정부 예산을 들여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 집단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 등의 진실을 가리기 위한 정부 위원회의 장관급 위원장을 5·18 직전에 수립된 구체적인 무력 폭동 계획에 관여한 인물이 맡고 있어 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증폭될 전망이다.

[5·18 진실찾기]

1988년 12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15호에 따르면 증인으로 출석한 한상석 씨는 청문회 위원인 권해옥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이 ‘자유노트’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묻자 “송선태와 내가 같이 썼다”고 답했다.

한상석 씨 증언에 따르면 ‘자유노트’는 1980년 10월25일 합동수사단에 압수됐고 한씨 등이 2심 재판을 받을 때 검찰이 증거로 제시해 법원이 채택했다. ‘자유노트’가 세상에 공개된 과정은 전남 운동권 총책으로 불린 윤한봉 씨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1980년에 전남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국민연합 전남지부장이었던 윤씨는 “그 노트를 (전남대) 학생회 간부 중 한 놈이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서 갖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수사가 일단락된 다음에 그 노트가 나와 뒤집지를 못했다”고 말했다. 5·18 직후 정부는 합수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으며 ‘자유노트’가 발각된 그해 10월 즈음엔 사실상 수사의 마무리 단계여서 유야무야됐다는 게 윤씨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자유노트’를 기록한 인물로 ‘송선태’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했다. 대중에 공개된 것은 정보공개를 통해서였다. 자유노트는 2007국방부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뒤 2010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하면서 ‘비공개’ 문서로 분류한 것을 정보공개 신청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5·18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매우 중요한 기록물로 꼽힌다.

윤씨의 지시를 받던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 씨는 ‘자유노트’의 도청 점령 계획이 실재했음을 증언으로 뒷받침하면서 송 위원장의 가담 여부를 언급했다. 양씨는 전남대5·18연구소 증언에서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며 “한상석·송선태·정동년·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협조적인 시민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교생을 동원하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 논의했고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고 밝혔다.

‘들불야학’ 강사였고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한 윤상원 씨는 그해 5월9일 청년운동권 회동에서 “군대 투입과 무장진압에 대비해 쇠 파이프·각목·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총기를 확보하고 TNT(다이너마이트)를 제작해서 자체무장을 해야 한다”고 윤한봉과 동일한 발언을 했다. 윤씨의 증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2권 168쪽(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에 기록돼 있다. 윤상원 씨는 계엄군의 도청 탈환 때 총에 맞아 죽었다.

충격적 무장봉기 계획… “다이너마이트도 써야”

윤한봉 씨 증언에 따르면 ‘자유노트’는 윤씨가 “부마항쟁처럼 흐지부지 끝나선 안 되고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해야 한다”고 말한 데서 출발한다.

윤씨는 “내가 무장투쟁하고 도청을 장악하고 (하자고 말)했던 이야기를 학생회 간부 애들이 듣고 선배들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우리도 호응을 같이 해야 한다”며 “이런 내용을 또 ‘자유노트’라는 데다가 전부 다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씨에 따르면 송 위원장은 당시 ‘자유노트’ 관련한 경찰 조사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라며 책임과 처벌을 회피하려 한 정황이 엿보인다. 윤씨는 “거기서 송선태가 자기가 그걸 작성했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막 썼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끝났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자유노트’는 실제 현실화한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가 입수한 ‘자유노트’ 문건에 따르면 무장폭동을 계획한 이들은 ‘19일 2~6시 북동 성당 시내 진출’이라고 시각과 위치를 좌표 찍듯 못 박았다.

또 카농(가톨릭농민회)과 가톨릭노동청년회·기도회의 연결고리를 제시했고, ‘죽창·밧데리·방송국·공공 건물 접수’에 이어 ‘예비군 무기고 접수’라는 표시에는 동그라미와 별표가 있다. 무기를 획득해야 할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실제 시위대는 19일에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유력한 증언이 있다. <본지 6월21일자 [5·18 진실찾기①] 軍레커 몰고 무기고 담장 돌진… 청년 20명 ‘우르르’ 보도 참조>

무장봉기 계획 자체가 충격적인 데다 이를 사전 공모한 정황이 포착됨에 따라 명확한 해명 없이는 송선태 위원장의 자격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마항쟁’ 반성적 고려가 항쟁계획서 ‘자유노트’ 계기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에 따르면 윤한봉 씨는 가톨릭농민회의 무장봉기 계획에 대해 더 충격적인 내막을 밝힌 적이 있다. 2006년 윤씨의 직접적인 구술면담에서다.

윤씨의 구술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이 면담에서 “사북 봉기가 터지고 동국제강 부산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하고 카농 농민운동단체들이 5월19일 대규모 시위를 광주에서 하기로 그렇게 결정이 됐고 전남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연대투쟁을 하기로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도청을 장악하고 끝까지 항쟁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라며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 있고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5·18 때는 예비군 무기고 44곳이 탈취됐고 전남도청 지하에 대규모 다이너마이트 등 폭발물이 설치됐다.

윤씨의 구술면담 발언은 실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운동화와 똥가방’이라는 저서 55~56쪽에서도 5월15일 8인회를 갖게된 배경을 밝히며 “부마항쟁처럼 흐지부지 끝나서는 안 된다. 상징적으로 도청을 점거해야 한다”고 구술면담과 동일한 내용을 강조한 바 있다.

윤씨는 또 1996년 저서 65쪽에 “우리도 무장해서라도 항쟁을 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항쟁전략을 세우자고 결정했고 그 결정에 따라 기획부장 송선태가 ‘자유노트’라고 알려진 항쟁계획서를 작성했다”고 구체적으로 못 박았다. 송 위원장이 경찰에 “상상력을 동원했다”고 말한 것은 윤씨 증언대로라면 거짓말이다.

‘자유노트’는 ‘광주권 학생 동원 요청 300+500명’이라고도 기입했다. 19일 봉기와 학생 동원 계획도 역시 현실화했다. 당시 순수 학생 참가자의 규모를 추산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송 위원장의 계엄군법회의 판결문을 통해 전남대 운동권은 이미 학생 동원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14일 전남대 운동장 500여 명 △광주역 가두시위 5000여 명 △15일 전남 도청 앞 8000여 명 △조선대생 2500여 명 등 학생 1만2000여 명이 경찰 등을 상대로 돌을 던져 상해를 입히는 투석전을 전개하고 가두시위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공용터미널’과 ‘북동성당’에서 타지방으로 확산한다는 향후 투쟁 방향도 ‘자유노트’에 명시된 대로다. 당시 도청 점령 이후 대전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는 증언도 확보된 바 있다.

사전 모의 시점도 시사점을 준다. 5·18증언록에 따르면 송 위원장이 모의에 참여했다고 알려진 시점은 5월11일이다. ‘자유노트’에 기재된 날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는 5·18 당일보다 일주일이나 빠르고 집단 발포 논란 직후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21일보다는 무려 10일이나 앞선 시점이다.

“봉기 주도 당사자가 공정조사 이끌겠나” 회의론 팽배

송선태 5·18진상조사위원장 전력 ‘커지는 불신’

특위에 나온 증인들 “자유노트 송선태와 같이 썼다” 밝혀

“한상석·송선태·정동년·김상윤 모여 도청 접수회의” 증언도

전문가들 “5·18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닌 준비된 반란 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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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법회의 판결문… “피고인 송선태, 정부 전복 결의에 참여”

계엄군법회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송선태 위원장 일행이 처음부터 비폭력 민주화 집회 계획이 없었으며 “정부 전복 결의에 참여”한 것으로 봤다.

안영기 위원(민정당 국회의원)은 송 위원장과 ‘자유노트’를 공동 기록했다는 한상석 씨와 관련한 청문회에서 “증인(한상석)의 80년 5월11~16일의 가두시위와 각종 미래를 예견하고 계획한 각본이 사실화 됐다는 것은 우연이기는 너무 참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박희태 위원(국회의원)도 “자유노트에 되어 있는 그 계획하고 실제 일어난 상황하고 일치가 된다”며 “그러니 누가 이 자유노트에 기재된 그 계획에 따라서 조정을 한 것이 아닌가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증인을 부른 것”이라고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광주민주화운동 재판기록 판결문3에 따르면 재판부는 제5 피고인인 송 위원장에 대해 “당시 전국적으로 사북사태·동국제강·근로자들의 파괴·방화농성 사태·불경기로 인한 실업자 급증과 김대중의 차기 집권을 위한 무분별한 선동적 작태 등으로 극도의 정세가 불안했다”며 “광주에서는 윤한봉·박관현 등이 학생 폭력 가두시위를 이용, 이를 저지하고자하는 군경과의 충돌 과정에서 유혈 사태를 유발해 흥분한 시민들을 가세시켜 민중 봉기에 의한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분위기가 몹시 험악한 상태에 이르렀고 광주의 각 대학이 연계해 일제히 조직적 폭력적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사회 혼란이 가속화됨은 물론 국기마저 위태롭게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피고인(송선태)도 이에 적극 가담했다”며 “4·19와 같이 학생 폭력 시위에 의해 정부를 전복하고자 결의하고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 있었다”고 봤다.

특히 판결문은 윤한봉 씨와 함께 민중봉기에 의한 정부 전복을 획책한 인물로 정동년과 김상윤에 이어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그러곤 송 위원장이 박관현과 시위계획을 수립하고 전국 대학에 사람을 파견하며 학생회장은 보호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며 허가없이 정치적 (불법)집회를 계획하는 과정을 함께하고 결의했다고 판시했다. 판결문대로라면 송 위원장은 윤한봉 씨의 무장봉기에 박관현 씨와 함께 참여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윤씨는 전남대생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1977년 출소했다. 1980년 5·18이 일어나자 중심인물로 현상수배된 뒤 미국으로 도피했다. 1993년 수배해제와 함께 귀국해 이듬해 5·18재단 창립을 주도했다. 2007년 사망 후 윤한봉기념사업회가 설립됐으며 이사장으로 문규현 신부가 임명됐다.


윤씨는 자유노트를 송 위원장이 옮겨 적었다는 대목에서 “그 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박정희 이제 암살 계획 팀들 중에서 정상용이 하고 (중략) 도청 항쟁 지도부에 들어가 버렸다”고 밝힌 사실이 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2(2006)’ 199쪽에 기록돼 있다. 윤씨는 또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씨의 1989년 북한 밀입북 사건의 배후인물로도 거론된다.

5·18을 연구해 온 A씨는 사견임을 전제로 “근현대사에서 폭력과 무장봉기를 사전에 계획했는데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송선태는 5·18 유공자… 도둑이 재판장 하는 격

본지가 단독 입수한 5·18 유공자 명단에 따르면 송선태 위원장은 계엄군법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돼 5·18 1차 유공자로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송 위원장은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과거 이력이 공정성 논란에 불씨를 제공했지만 그가 직접 유공자 혜택을 받아 온 사실이 공식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본지 취재진은 올해 5월 광주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의 이름이 5·18기념공원 내 지하 추모승화공간 명패에 새겨진 사실을 인지했다. 61열 위로부터 25번째 위치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최근 송 위원장의 의견을 듣기 위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전화해 유공자 등록에 관한 송 위원장의 의견 청취 목적임을 밝히고 기다렸으나 회신이 오질 않았다.

위원장 보좌관실의 김욱 보좌관은 “송 위원장이 회의 중이다”라며 “위원장께 전달해 연락드리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무응답이었다. 본지는 또 한번 전화해 요청을 전달했지만 송 위원장은 끝내 회신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김욱 보좌관은 “송 위원장이 유공자인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5·18을 연구해 온 B씨는 “광주폭동이 우연히 발생한 항쟁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되고 준비된 무장반란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C씨는 “일주일 전에 어떤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데 ‘도청을 점령한다’는 모의를 한 게 사실이라면 5·18에 물리력을 동원하려 한 주범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며 송 위원장은 진상 규명의 주체가 아니라 피고발 대상자로 조사받아야 할 처지라는 입장을 본지에 전해 왔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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