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군사반란에서 무장을 한 시민들을 시민군이라고 했는데, 그 시점을 김대중은 1980.5.21 오후 1시로 정했고, 그 이유는 공수부대가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서 광주시민들이 살기위해 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시민군은 이을설 부대원 600명과 김대중 반란군 여단의 4,000명이 포함된 포괄적인 의미이므로 시민군에서 이을설 부대원 600명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을설 부대원은 21일 오후 3시 30분부터 4시까지 11여단 62대대 4지역대의 집단발포로 거의 전멸을 하고 25일 01시에 전남도청에서 강탈한 아시아 자동차에서 강탈한 군용차량 19대를 타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김대중 반란군 여단 4,000명은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 바로 군분교 점령사건이었는데, 이을설 부대원들이 광주시내에서 양동작전으로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있을 때 김대중 반란군 여단은 군분교를 점령하고, 군분교에서 톨게이트까지 1킬로 가량을 장애물을 설치하고, 아시아 자동차 진입로 4군데 중에서 3군데 진입로를 절개절단을 했고, 군용차와 장갑차가 출동을 할수 있도록 타이어에 바람을 넣고, 냉각수를 채우고, 엔진오일을 채우고, 배터리를 장착했으며, 17개 시군읍에 있는 44군데 무기고에서 사전에 부대 지휘관들과 협의해 무기를 다 빼내어 북한군들이 몰고 올 군용트럭에 적재할 준비를 했었던 작전을 수행 했습니다.
군분교 점령작전을 수행했던 김대중 여단 반란군 4,000명은 시민군이 아니며, 지금은 모두 518 유공자가 되어서 518 단체들을 장악하고 518 군사반란의 흔적을 지우면서 이런 반란행위를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하는 작업을 지속하는 중이어서 518 군사반란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군분교 점령작전에 대한 작전상황을 국민들이 모두 다 아시고 계셔야만 김대중 반란군 여단은 더 이상 국민들을 속이지 못할 것이며,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해서 이들을 색출해 모두 사법처리를 해야만 518 군사반란이 끝나게 되는 것 입니다.
군분교 점령작전의 주병력은 바로 김대중 여단의 4,000명 반란군이었습니다.
이게 사실상 제일 중요한 이슈죠. 이걸 덮을려고 북한군 이슈로 막았던거죠. ㅎㅎ 김대중 여단 반란군 실체가 바로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