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교도소 무연고 유골에서 발견되었다는 20대 청년 실종장소와 시간은?



최근 광주 교도소 무연고 유골더비에서 1980.5.24일 밤 11시에 광주시내로 나갔다 실종된 사람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광주 교도소 무연고 유골더미에서 찾는 실종자는 광주교도소 습격을 하다가 진압군에 의해 희생 당한 후 교도소 인근에 암매장되었다고 추정되는 희생자들 인데, 발견되었다는 희생자는 왜 교도소가 아닌 시내로 간다면서 실종이 되었는 지에 대하여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먼저, 2019.12월경 발견된 광주 교도소 무연고 유골들은 518 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만 모아 놓은 것이 아니고, 또 518때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이 썩여 있는지도 확인된 바가 없는데, 이 유골들은 광주교도소가 관리하던 유골과 관리대장에 없던 유골들이 함께 썩여서 관리되었는데, 1908년 광주 교도소가 문을 열면서부터 사망한 죄수나 사형수들의 유골이며, 특히 6.25 전쟁 중에는 많은 사형수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518 기념재단에서도 처음에 이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현장을 찾아서 확인을 해보고, 법무부 관리장부와 유골들의 숫자가 맞고 사망경위가 맞아서 518 실종자와 관련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를 한 것입니다.


다음에는 실종자의 실종시간과 실종장소 그리고 광주 교도소 습격 일지 그리고 실종자가 사변사태인 광주시내를 밤에 활보를 할 수 있었던 신분이었던 점을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그는 5월 항쟁이 한창이던 80년 5월 24일 오후 1시께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가 오후 11시께 처제를 만난 것으로 기록돼 있고, 처제를 만난 그는 당시 충장로 또는 금남로를 뜻하던 '시내'에 간다며 길을 나섰다가 연락이 두절됐다고 하며, 2년 만에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합장묘에서 발견된 유골 중 하나로 발견되어 계엄군에게 희생된 실종자로 확정되어 가는 중입니다.


우선 80년 5월 24일 오후 1시께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 온 시간은 그 유명한 북한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해 일으킨 오인사격 사건 직전의 시간이었고, 시내로 나간 밤 11시에는 이을설 부대 잔존병력이 도청에서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시간이었고, 별다른 사건은 없었으며, 특히 교도소 습격은 없었던 시간인데, 참고로 교도소 습격 사건 일지를 알려 드립니다.


1차습격 21일 19:30 2차습격 22일 00:40-00:50분 3차습격 22일 09:00경 4차습격 22일 10:20 5차습격 23일 08:00 6차습격 23일 19:00-19:40 이렇게 교도소 습격이 있었는데, 실종자는 24일 밤 11시에 집을 나갔다고 하니까 최소한 25일 01시 이후에 교도소 습격 사건에 참가를 해서 실종되었어야 만 교도소 합장묘소에서 발견이 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그 다음에 실종자가 마지막으로 향한다고 했던 곳은 관할구역이 계엄군 관할구역이 아닌 소위 해방구로서 해방구에서 실종이 되었다면 그 시각 이후로 이을설 부대로부터 관할을 이양받은 김대중 여단 반란군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데, 계엄군 소행으로 몰고 가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그 다음 합장묘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드리겠는데, 2019.12.19일 법무부 지시를 받고 묘지를 이장·수습하는 업체가 개인 묘 50기와 합장묘 2기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묘지를 다 이장을 마치고 법무부 대장과 대조해 이상을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 마지막 봉분을 파 헤쳤을 때 문제의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 입니다.


유골이 한곳에 모여 있거나 정돈된 상태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상태로 쏟아져 나왔고, 그 아래는 또 콘크리트 통에 또 다른 유골더미가 똑 같은 방식으로 있었는데, 땅속에 있는 유골은 콘크리트 통에 있는 유골보다 더 많이 삭아 있었고 이들 유골은 법무부 대장에 없었던 유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유골들은 법무부에서 공식적으로 관리하기 이전에 교도소에서 사망했거나 사형수들의 유골일 가능성이 높고 그 시기는 일제시대때부터 법무부가 공식적 관리 대장을 만들어 관리하기 이전에 사망해 처리된 유골들인데, 이 유골더미에서 희생자의 유골이 나왔다는 것인데, 실종된 시기는 법무부가 관리를 시작한 이후로서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의문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시내에서 김대중 여단 반란군 치하에서 실종된 사람을 계엄군 관할인 교도소 인근에서 사망했다고 추정하면서 법무부가 시신관리를 하기 이전에 발견된 유골더미에서 실종자의 유전자가 나왔다고 실종자라고 확정 발표를 한 것은 발표의 신뢰성에 심각한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유전자로 확인하는 것은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또는 손자 이런 구분까지 하기는 어려운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실종시간을 종합해 본다면, 공간적으로는 실종자와 유골더미는 관련성이 존재하기 희박하고, 시간적으로는 법무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합장묘 유골더미에서 실종자가 발견될 수가 없으며, 실종자의 다른 혈연관계자일 가능성이 존재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오류와 억지가 계속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은 바로 김대중 여단 반란군의 실체가 반란군이었던 전투교육사령부의 헌병대와 보안부대 그리고 예속된 경찰이 김대중 여단 반란군을 시민군이란 틀 속에 덤으로 넣어서 희석해 국민을 속였기 때문인데, 김대중 여단 반란군은 시민군이 아니라 전투교육사령부와 31사단 20사단 그리고 이을설 부대와 함께 반란 군사작전을 했던 전투부대로서 시민군과 반드시 분리해 조사를 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유공자 명단을 공개를 해야만 하는 것 입니다.


반란군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서 인권 운운 하면서 유공자 명단 거부를 하는 것은 김대중 여단 반란군의 실체를 숨겨 주기 위한 적극적 반국가 자세로 정의를 할 수 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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